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필리프 1세 (문단 편집) === 인간적인 면모 === 치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는 별도로, 루이필리프 본인은 선량하고 너그러운 문자 그대로의 [[신사]]였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32|루이필리프의 선량함에 대한 일화]] 사실 '왕으로 모시자'고 지지할 정도의 파벌이 있을 정도이니 그 나름대로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은 당연하긴 하다. 요약하면 군주로는 무능했지만 인간성은 좋은 인물.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빅토르 위고]]도 루이필리프를 높게 평가했다. 위고는 [[1848년]] 혁명 당시에도 루이필리프의 손자를 옹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두상이 [[서양배]]와 닮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의 문장도 배라고 조롱했지만 루이필리프는 대범하게 웃어넘겼다고 한다. 얼마나 대범한지 서양배 머리의 왕을 그린 만평도 나돌아도 멀쩡했을 정도. [[파일:external/loverofone.weebly.com/9468949_orig.jpg|width=100%]] 당시 만평. 배머리로 데포르메되는 과정이 적나라하다. 심지어 궁궐 벽에 [[배(과일)|배]]를 그리면서 왕을 조롱하는 부랑아들과 같이 배를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금화까지 쥐어주면서 '''"이 금화에도 배가 새겨져 있다"'''고 농담까지 해주었다.[* 당시 프랑스 동전엔 여느 유럽 군주국들이 그렇듯 재위 중인 군주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대인배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또다른 일화로 왕을 몰아내려던 [[1832년 6월 봉기]]가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에 파리의 경찰청장 앙리 지스케는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러 온 반역자들을 내놓지 않으면 재미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루이필리프는 "살려고 의사들을 찾아간 환자들을 의사 손으로 [[단두대]]에 보내는 그따위 비인도적인 처사가 어디 있느냐"며 반역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전의 부르봉 왕조의 국왕들과는 다르게 사생활이 깨끗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애인]]이나 총희를 둔 바도 없으며, 항상 자신의 아내하고만 잤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를 자랑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을 초대해 자신의 침실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1835년]], 코르시카 출신의 [[https://en.wikipedia.org/wiki/Giuseppe_Marco_Fieschi|주세페 마리오 피에스키]](Giuseppe Marco Fieschi)[* [[이탈리아어]]로 읽으면 "피에스키"가 되고, [[코르시카어]]로 읽으면 "피에시"(/fiɛʃi/)가 된다.]라는 인물이 탕플 대로(Boulevard du Temple)에 파리 근위대 사열식에 참석한 루이필리프 및 정부 각료들을 향해 총을 발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루이필리프와 그의 아들 셋, 여러 하인들과 관료들이 참석한 사열식이 진행되고 있었고, 피에스키는 대로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행이 탕플 대로를 지나가는 순간 피에스키는 아래를 향해 총을 발사하였다.][* 25개의 총신을 하나로 묶어 한 번에 25발을 발사할 수 있는 상당히 독특한 총이었다. [[볼리 건]]의 일종이긴 한데, 우리가 흔히 아는 대포 모양의 볼리 건과는 다르게 생겼다. 혹자는 이 총의 외양을 설명하면서 큰 [[마림바]]를 예로 들 정도. [[https://en.wikipedia.org/wiki/Infernal_machine_%28weapon%29|영문 위키피디아에 이 총을 다룬 문서까지 있다.]] "지옥의 기관총"(machine infernale)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어 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국립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건 당시 25개의 총신 중 넷은 발사 당시 터져버렸고, 넷은 불발되었고, 하나는 장전되지 않았다고 하니 전부 제대로 발사되었다면 사건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여담으로 피에스키 또한 사건 직후 총의 반동으로 머리 등을 심하게 다쳤고, 결국 손가락 두 개를 절단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루이필리프 본인은 부상을 입었으며,[* 총알이 이마를 스치는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그의 말 및 [[에두아르 모르티에]] 원수 등 총 17명의 고관이 살해당하고 22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중 최소 넷은 팔다리를 절단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이 때문에 영문 위키피디아에 피에스키는 "대량살인자"(mass murderer)로 기재되어 있다.] 피에스키는 나폴레옹 시대 병사로 복무하였으며, 전역 이후 생활고로 각종 절도 행각을 버리다 10년을 복역한 이력이 있었다. 허나 석방 후에도 계속되는 감시와 생활고에 분노하여 이런 사건을 벌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피에스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루이필리프는 피에스키의 사정을 듣고 몹시 가슴아파하며 '''"나 하나만 다쳤다면 사면을 해줬을 텐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